
④ 사랑이 불안한 밤 – 로제 와인과 알랭 드 보통
저녁이 어둑해지는 시간, 냉장고에서 막 꺼낸 로제 와인 한 병을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병 표면에 맺힌 투명한 물방울들이 천천히 흘러내리고, 코르크를 뽑자 잔에 부어지는 핑크빛 액체가 유리 벽을 타고 부드럽게 흐른다. 빛에 비추면 연분홍과 연한 자주 사이 어딘가에 머무는 색. 한 모금 머금으면 차갑고 산뜻하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쓸쓸한 기운이 입안에 맴돈다.
오늘도 나는 한 사람을 생각했다. 메시지를 보냈는데 답이 늦어질 때마다 커지는 불안. "나만 이렇게 신경 쓰는 건가" 하는 초라함. 따뜻한 말 한마디에 설레다가도, 문득 "이 사람 마음이 정말 나에게 있는 걸까" 하는 의심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사랑은 왜 이렇게, 늘 불안과 함께 오는 걸까. 로제 잔을 천천히 돌리며, 나는 그 물음을 입 밖으로 꺼내본다.
로제 와인은 참 애매한 와인이다. 레드의 강렬함도, 화이트의 청량함도 아닌, 그 사이 어딘가에 걸쳐 있다. 색만 봐도 알 수 있다. 완전한 붉음도, 투명한 금빛도 아닌, 그 중간의 핑크. 가벼운 산도는 여름날 오후처럼 상쾌하지만, 입안에 남는 여운은 왠지 허전하다. 설레지만 동시에 불안하다. 기대했지만 어쩐지 확신이 서지 않는다. 마치 연애 초반, 좋아하는 마음은 분명한데 상대의 진심은 아직 가늠되지 않는 그 순간처럼.
로제를 마실 때마다 나는 관계의 애매함을 떠올린다. 확신과 의심 사이, 기대와 두려움 사이에 서 있는 우리의 모습. 완전히 레드도, 완전히 화이트도 아닌, 이 와인의 색깔처럼 사랑도 언제나 어느 한쪽으로 딱 떨어지지 않는다.
알랭 드 보통은 사랑을 이상적인 감정의 완성으로 보지 않았다. 그는 사랑을 서로의 서투름을 드러내고, 그 불완전함을 이해해 가는 과정으로 봤다. 우리가 사랑 앞에서 유난히 불안한 이유는, 사랑이 우리 안의 가장 연약한 부분을 건드리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 충분히 사랑받지 못했던 기억, 버림받을지 모른다는 원초적 두려움, 내가 이대로는 부족하다는 깊은 불안감. 사랑은 이 모든 것을 수면 위로 끌어올린다.
그래서 우리는 상대의 마음을 확인하고 싶어진다. 메시지 하나에도 과하게 의미를 부여한다. "이 말투는 뭔가 차가운 것 같아", "오늘은 연락이 없네, 마음이 식은 건가". 나만 이렇게 애쓰는 건 아닐까 하는 두려움은, 사랑이 깊어질수록 더 커지기도 한다. 드 보통은 말한다. 사랑은 우리를 안전하게 만드는 감정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를 가장 취약하게 만드는 감정이라고.
로제 잔을 기울일 때마다 빛이 달라 보인다. 같은 와인인데, 각도에 따라 더 붉어 보이기도 하고 더 투명해 보이기도 한다. 사랑도 그렇다. 같은 사람인데, 날마다 다르게 느껴진다. 어제는 따뜻하게 느껴졌던 말이, 오늘은 무심하게 들린다. 어제는 사랑받는다고 확신했는데, 오늘은 혼자 헤매는 기분이다. 그 순간들 사이를 오가며, 우리는 불안해한다.
하지만 드 보통이 우리에게 말해주는 건 이것이다. 사랑을 '불안이 없는 상태'로 만들려고 애쓰지 말라고. 대신, 그 불안을 함께 견디고 이야기할 수 있는 사이를 만들라고. 사랑은 완벽한 확신이 아니라, 서로의 흔들림을 인정하고 그럼에도 곁에 머무는 선택이다. 로제 와인이 레드와 화이트 사이에서 자신만의 색을 찾아낸 것처럼, 우리의 사랑도 불안과 확신 사이에서 균형을 찾아가는 과정이다.
혹시 스스로를 "집착이 많은 사람", "너무 예민한 사람"이라고 느끼고 있다면, 잠시 멈춰 서서 이렇게 생각해보면 어떨까. 사랑 앞에서 불안해지는 건, 사랑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그만큼 소중하기 때문일 수도 있다고. 마음이 쓰이는 건, 마음을 쓸 만큼 깊이 들어온 사람이 있다는 증거일 수도 있다고.
관계에서 완벽해지려 하지 않아도 된다. "나는 이렇게 불안하다"라고 솔직히 말할 수 있는 용기가, 어쩌면 더 큰 친밀감으로 이어질 수 있다. 서로의 서투름을 숨기지 않고 보여줄 수 있을 때, 비로소 진짜 사랑이 시작되는지도 모른다. 완벽한 사랑은 없다. 다만, 불완전함을 함께 견디는 사랑은 있다.
로제 잔에 남은 마지막 한 모금을 천천히 마신다. 차가움이 목을 타고 내려가고, 입안에 희미한 산미가 남는다. 사랑이 불안한 밤이지만, 그 불안을 없애려 애쓰기보다는, 같이 바라봐 줄 사람을 떠올려 본다. 오늘의 나도 서투르지만, 그래도 괜찮다. 로제 와인처럼, 애매하지만 아름다운, 확신과 의심 사이 어딘가에 선 이 마음도, 나쁘지 않다.
🍷 추천 로제 와인 5선 (국내 수입/구매 쉬운 편)
| 와인 | 특징&분위기 | 대략 가격대 / 구매 편의성 |
| Château d'Esclans Whispering Angel Rosé | 프랑스 프로방스 대표 로제. 산뜻하고 우아한 복숭아·붉은 베리 향 + 가벼운 바디감. 크리스마스 디너, 파티, 선물용 모두 무난하고 고급스러움. | 약 4만–6만 원대. 해외 수입되며 일반 와인샵이나 백화점에서 비교적 자주 보임. |
| Château Miraval 'Studio' Rosé | 연한 핑크빛, 꽃향 + 붉은 과일 향의 균형이 잘 맞는 부드러운 로제. 파스타, 해산물, 샐러드 등과 잘 어울림. | 중급 가격대. 국내 수입 와인샵이나 일부 온라인몰에서 구할 수 있음. |
| Roche Mazet Rosé | 베리 향이 달콤하고 부드러운 가성비 좋은 로제. 무겁지 않아 와인 입문자나 캐주얼한 모임에 적합. | 1만~2만 원대. 대형마트나 편의점, 와인샵에서 구매하기 쉬움. |
| Sieur d’Arques Bubble No.1 Rosé | 스파클링 로제 스타일. 기포 있고 상큼한 과일향 + 가볍고 산뜻한 맛. 식전주나 디저트와 함께하기 좋고, 파티 분위기 내기 좋음. | 2만 원대 전후. 대형마트나 수입 와인 판매처에서 종종 보임. |
| Luc Belaire Rosé | 프랑스산 로제 중 하나. 약간 드라이하면서도 세련된 스타일. 파티, 기념일, 선물용으로 인기. | 중–상급대. 수입 와인 전문 매장이나 온라인 채널에서 구하기 가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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